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 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올해 추석연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 날씨도 여름 햇살에 간간히 매미 소리까지 들리는 여름과 가을이 공존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은 빛 고운 가을 색을 담아내고 있어 가을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잠깐 짬을 내어 고창 선운사에 다녀왔다. 매년 이맘 때 쯤 이면 어김없이 하는 연례행사다.

일명 상사화라 불리는 꽃무릇으로 선운사가 온통 물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무성하게 올라 온 꽃봉오리들만 보고 왔다. 또 어느 해인가는 꽃 지는 모습만 허탈히 바라보다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추석연휴 덕분으로 개화 절정의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둑 밭둑길, 야산이나 고갯마루에 피어오른 억새 꽃, 한 알의 씨앗이 이루어낸 아름답고 장엄한 들판을 가로질러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꽉 메워져 있었고, 피어 오른 상사화만큼이나 구경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천지 사방으로 억만 겁(迲) 건너온 그리움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남편도 나도 핸드폰을 차안에 두고 내려 그 절정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눈으로 마음으로 차고 넘치도록 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 천 년을 살아도 꽃은 잎을 못 보고, 잎은 꽃을 만날 수 없는 절절한 그 그리움을 일러 상사화라 했다던가.‘인간 만사 이별 중에 독수공방이 상사난이란다∼’고 매화타령에도 나온다. 상사화(相思花)는 잎이 모두 말라죽은 것처럼 없어졌을 때 비로소 꽃대가 올라와서 꽃이 핀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서로 보지 못하고 애타게 생각만 한다고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꽃말도‘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서로를 그리워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슬픈 인연의 꽃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랑을 그리워하며 붉은 입술로 가을을 노래하는 꽃 무릇의 숨겨진 아픔을 사람들은 시로 글로 풀어내었다.

‘잠시 멈칫대는 빗속을 비집고 흐린 하늘을 향 해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우고 너를 찾는다. 네가 나를 찾아 온 봄내 푸른 잎 너울거리다 누렇게 뜬 얼굴로 쓸쓸히 돌아간 저녁 어스름을 난 정녕 모르고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 왔다 간 것을 네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천년 그리움의 세월 한번쯤은 만나고파 비 쏟아지는 벌판에서 너를 찾아 헤메는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조규옥 시인의‘상사화’시 전문이다. 참으로 애절하고 쓸쓸함이 전해 온다.

중국의 전국시대, 송나라 강왕의 문객 가운데 한 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씨 성을 가진 빼어난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강왕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한 빙의 아내를 빼앗고 한 빙을 모진 형벌에 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한 빙이 자살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한 빙의 아내도 따라서 죽고 말았다. 한 빙의 아내가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원컨대 저의 주검을 남편과 함께 묻어주기 바랍니다.”이에 화가 난 강왕은 그녀의 유언을 무시하고 서로 보이는 곳에 두 사람의 무덤을 만들게 했단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두 무덤 끝에 커다란 가래나무가 자라기 시작해 열흘이 지나자 서로를 감싸고 휘어지며 서로에게 향했다고 한다. 또한 암수 원앙새 한 쌍이 하루 종일 나무 가지에 앉아 슬피 울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나무를‘상사수(相思樹)’라고 부르게 되었으며,‘서로를 그린다’는 뜻의‘상사(相思)’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몸은 갈라놓을 수 있어도 마음은 갈라놓을 수 없다. 그리운 마음이 극에 달하면 이처럼 무덤에도 꽃이 피고, 나무로 자라서도 서로에게로 향하는 가보다. 친정집 앞마당에도 홍자색을 띈 원뿔형 상사화 몇 송이가 피었다. 봄에 얼었던 대지를 비집고 연녹색의 풀잎이 고개를 내밀었었다. 봄바람을 향유하던 잎은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긴긴 장맛비, 그 뜨겁던 불볕더위를 지나 어느 날 돌연히 연두 빛 싱싱한 꽃줄기로 불쑥 솟아오르더니 드디어 꽃을 피워냈다. 식물은 결코 서두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유를 갖고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랜만에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긴 목마름이 꽃불로 타던 가슴도 젖는다. 이 가을‘만세루’에 앉아 마시던 따뜻한 차 한 잔이 유독 그립다. 불꽃이어라 사랑이어라. 선운사의 천년 침묵이 다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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