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 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수은주 높은 날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이고 서서 노랗게 함박웃음을 웃던 호박꽃을 생각하면 뭔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진다. 호박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느낌은 사실 별로였던 것 같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만 해도 그렇다. ‘호박 같은 내 얼굴 미웁기도 하지요’ 그렇게 호박하면 왠지 무식해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지 못해 푸대접 받는다는 걸 떠 올리게 된다.

흔히 아름답지 못하고 못 생긴 여자를 호박꽃에 비유하기도 하지 않는가. 어떤 시인은 ‘호박 같은 세상’이라 하며 부조리 투성이의 허무한 인생사를 호박이나 호박넝쿨로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웃나라 중국이나 저 멀리 미국에서의 호박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다. 중국 사람들은 호박의 씨앗이 풍부하기에 다산을, 아무데서나 잘 자라기에 건강을, 그리고 많이 열리기에 소득을 상징하여 제단에 사시사철 늙은 호박을 바친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명절 할로윈 데이는 호박의 명절이다. 호박에 사람 모양을 그려 그 속에 촛불을 켜 놓고 명절을 즐길 만큼 호박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젊은 날엔 호박과 관련한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씩 나이 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늙은 호박으로 맛나게 쑨 호박죽을 즐겨 먹게 되었다. 실은 예전에는 모양새 없는 늙은 호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게 호박은 그저 장식품이었기 때문이다.

늦가을이면 수확한 늙은 호박들 중에 가장 예쁘게 골지고 펑퍼짐한 것들을 골라 기둥처럼 서 있는 새우젓 도가지 위에 장식품으로 세팅하곤 했다. 한 겨울 내내 한 자리 그렇게 말없이 앉아만 있던 늙은 호박은 봄이 되면서 밑둥에서부터 조금씩 쪼그라들다가 그대로 썩어서 두엄자리로 향하곤 했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늙은 호박이 더 이상 장식품이 아닌 든든한 간식거리, 몸에 좋은 맛나고 아름다운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 해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남편은 모양새도 없는 커다란 늙은 호박 한통을 들고 왔다. 무슨 일인가 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한창인데도 학교울타리에 호박이 멀쩡히 달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설마 그 겨울을 난 호박이 성할 리 만무였다. ‘얼었던 게 풀리면 제 모습을 드러내겠지’ 하는 생각으로 현관 한쪽 구석으로 밀쳐 두었다. 그리곤 한동안 잊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현관 청소를 하다가 다시 만났는데, 전혀 쭈굴쭈굴 해지지도 않고 처음 올 때 그 모습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 리가 없었다.
눌러보고 만져 봐도 단단한 것이. ‘참 이상하기도 하다’ 생각하며 늙은 호박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겨 내고 토막토막 단도 질을 했다.

껍질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그런데 속살은 홍시처럼 불그레한 게 어여쁘고, 가을날 금방 수확한 것처럼 싱싱했다. 워낙 길쭉하고 커서 양도 제법 많았다. 무슨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도 아닐 텐데. 한 겨울을 나고도 멀쩡했던 그 늙은 호박의 미스터리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너무나 신기하게 매서운 겨울을 까딱없이 잘 견뎌낸 기특한 호박이어서 봄에 심으려고 씨를 신문지에 펴서 말려 두었다. 그 후, 학교에서 노작교육의 일환으로 매년 실시하고 있는 ‘해바라기 심고, 가꾸고, 수확하기, 프로그램을 위해 해바라기 씨를 품을 때, 말려 두었던 호박씨도 함께 품었다. 해바라기 심던 날. 잘 자란 호박 묘 몇 그루를 가져와서 두엄자리 옆에 심었다.

그리고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빠르게 돌아가는 삶속에서 또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여름방학 어느 날인가. 친정어머니는 “호박이 너무 탐스럽게 잘 익었다”시며 가서 보자 하셨다. 따라가 보니 봉분 모습의 두엄자리에는 그 겨울에 만났던, 늙은 호박과 똑같은 모습으로 덩이덩이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얼마나 크고 탐스러운지 족히 한 아름은 될 것 같았다.

그 날, 냉동실에 남아 있던 마지막 호박 봉지를 꺼내 죽을 끓였다. 맘만 내키면 언제든지 꺼내서 죽을 끓이곤 했는데, 이젠 아주 아쉽게 됐다. 그래도 걱정은 안 된다. 봉분위에 평화로이 누워있는 튼실한 호박들을 생각하면, 그저 배가 부른 듯 든든하다. 늙은 호박은 겉보기는 덩치만 크고 촌스러워 보이지만, 약용으로 식용으로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

늙은 호박은 카로틴 등의 영양 성분이 풍부하여 ‘가을 보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타민과 미네랄도 풍부하며 무엇보다 그 당분은 소화 흡수도 잘 되고 다양한 병의 예방효과도 크단다. 그러한 효능이 알려지면서 예전에 너무 흔하고 맛이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으로 푸대접을 받아 온 늙은 호박들이 요즘은 몸값이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호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떻든 내게 늙은 호박은 이제 보석 ‘호박’ 그 이상으로 귀하고 감사한 것이다. 그야말로 뒹굴뒹굴 도는 호박 같은 편안하고 행복한 세상, 그 맛난 여행은 아무래도 계속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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