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이것저것 뒤돌아보지 말고 훌쩍 떠나자, 이번 여행의 모토였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엉켜 있던 시간들을 차분히 풀어서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훌쩍 떠나온 공간은 필연적으로 나의 동선을 바꿀 테고 동선이 바뀌면 감각을 사용하는 패턴이 바뀌고, 감각의 패턴이 바뀌면 생각의 회로도 바뀔 테니까... 여행이 주는 행복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것 같다. 일상을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낀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니까.

해외여행을 떠날 때면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널널했던 기억,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공항 서가에서 책 몇 권 챙겨가곤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짬이 주어지지 않았다.

새벽에 도착한 공항은 여전히 북적거렸다. 여행사 직원과 미팅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엔 어찌된 연유인지 창구에서 직접 티켓 팅을 해야 했고, 짐을 부치고 나자마자 뛰어가서야 빠듯하게 비행기에 탑승할 수가 있었다. 비행시간 동안 기내에 꽂혀있던 잡지를 한장 한장 뚫어질 듯이 꼼꼼하게 다 읽어 냈고, 비몽사몽 눈을 떴다 감았다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시간은 그대로 멈춰 있는 듯 했다. 나중에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대며 책 한권 미리 챙기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낯선 여행지에서의 시간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잘도 흘러갔다.

여행 속에는 언제나 일상의 리듬을 깨뜨리는 긴장감,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자 특유의 설렘, 버리고 떠나온 일상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 지금 이 순간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함. 이런 것들이 고루 섞여 있는 여행자들 특유의 어슴푸레한 표정이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어쩐지 낯익은 그런 느낌은 ‘여행자표’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낯선 공간에서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지만 반갑게 웃어주고 인사하며, 때로는 수많은 ‘언어의 대체재’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가 있다.

거기다가 현지에서 11년째 살고 있다는 최 부장이라 불러 달라던 그 사람. 그는 아주 노련하고 세련된 가이드였다. 그런 그의 맛깔스럽고 특별한 안내가 이번 여행의 행복을 한 뼘 더 높여 주었다.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돌아오기 전날이 돼서야 기내의 좁은 공간에서 미쳐 버릴 듯 무료하던 비행시간이 떠올랐다. 돌아갈 때는 또 어찌 보낼 것인지. 고민 끝에 최 부장에게 부탁을 했다. 기내에서 읽을 만한 책 한권만 가져다 줄 수 있느냐고. 그는 기꺼이 그러겠노라 했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수시로 깜빡거리는 내 습성 상 그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출발당일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직 너처럼 그렇게 깜빡거리지 않는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부터 열어 책 한권을 건넸다.「호미」였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지난해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님의 수필집이다. 언젠가 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경건한 고백처럼, 자연과 사람을 인내의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건져 올린 경탄과 기쁨이자 애정과 감사가 가득한 글들이다.

한장 한장 넘길수록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기꺼이 책을 가져다 준 최 부장을 생각하니 새롭게 읽어가는 기쁨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시간도 더불어 잘 흘러갔다. 제목이「호미」이듯이 이 책 속에는 노(老)작가가 호미를 쥐고 마당에 돋아난 것들과 함께 사는 얘기가 가득하다.

호미예찬을 하고 있는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김매기에 비유하고 있다. “이 나이 이거 거저먹은 나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책머리 중에서)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호미>에서 그녀는 돌아보니 자연이 하는 일은 다 옳았다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어디선가 새벽 풀 향이 가슴으로 진동했다. 조금만 더 부지런하고 마음을 열면 언제 어디서든 자연의 순결한 향을 맡을 수 있다. 사람 사이도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이해하면 놓치고 사는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행복. 여행하기 전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 설레는 마음이 주는 행복의 주기는 보통 8주라고 한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후의 행복의 주기는 겨우 열흘 남짓이라고 한다. 마음을 느슨하고 여유롭게 했던 이번 여행을 다녀 온지 열흘이 다 되어 간다.

여행을 다녀온 후의 행복주기라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이 주는 행복의 유통기한은 더 길어질 성 싶다. 최 부장이 잊지 않고 건네주었던「호미」라는 책이 내 손 안에 있는 한 그 행복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것 같다.

누군가를 보듬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무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이 그렇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나무가 그렇다. 오늘도 창문 밖에 산들은 흰 눈을 보듬고 따뜻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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